눈 위에 내려앉은 시간, 춘곡정 설경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 산43-8,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한 **춘곡정(春谷亭)**은 하얀 설경 속에서 더욱 고즈넉한 자태를 드러냈다.
한때 이곳은 1400년경 조양임씨가 터를 잡으며 형성된 외정마을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이었고, 산수는 빼어나 선비들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과 개발의 흐름 속에서 마을은 사라지고, 지금은 춘곡정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라진 마을, 남겨진 상징
춘곡정은 조선 말기 조양인 동지돈녕부사를 지낸 **임재환(1852~1938)**이 1929년,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자다.
벼슬을 마친 뒤 학문을 닦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공간으로, 자연 속에서 마음을 수양하던 선비 정신이 깃든 곳이다.
눈 덮인 날, 정자가 물가에 비치는 풍경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고요하다.
“푸른 물과 푸른 산을 겸하여 다스리고,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갠 날의 달을 또 경영했다”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정자는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철학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석정리의 옛 이름, 승산에서 석정으로
이곳 석정리는 조선 전기 ‘승산(昇山)’이라 불렸다가, 입상석불이 웅덩이 아래 묻혀 있었다는 데서 ‘추하(湫下)’라는 이름을 거쳐 ‘석정(石汀)’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돌과 물이 많은 산간 마을이라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지금은 개발로 예전 마을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춘곡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시간의 층위를 지키고 있다.

설경 속에서 만나는 선비의 쉼
겨울의 춘곡정은 특별하다.
눈이 소리까지 삼켜버린 듯 고요하고, 호수는 거울처럼 정자를 비춘다.
사라진 외정마을의 기억,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학문을 이어가려 했던 한 선비의 뜻,
그리고 자연과 교감하던 조선 정자의 미학이 겹쳐진 공간.
춘곡정 설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간과 정신이 함께 내려앉은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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